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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사는 화순 천태산 중턱에 있다. 통일신라 헌덕왕 말기(809-825년) 도의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통일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용화사로 불리웠다.천불전이 있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1963년에 주지 김태봉이 주민들의 협조로 대웅전과 요사를 중건하였다. 사찰 입구에는 나무벅수가 무심히 서 있고 주변산에는 비자나무숲(도 지정 기념물65호)이 우거져 있다.개천사에는 석종형과 팔각원당식 부도가 5기 있다. 모두 18~19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비자나무 숲
해발 494m의 천태산 중턱에 자생하고 있는 비자나무숲은 개천사 사찰림(약 15정보)과 사유림(약 6정보)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자생하고 있는 비자나무는 대개 둘레가 2m 이상으로 서수령은 약 3백년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개천사
중수문도의 맥락이 일어나 왕성하게 됨과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하게 됨은 운수의 모임과 운수의 흩어짐을 보아 불도의 왕성할 것과 쇠퇴할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화순고을의 남쪽에 위치한 천태산의 개천사는 호남의 명승사찰로 신라 초년 중국 한나라 선재 오봉원년(서기 57년)에 창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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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연대가 확실하게 전하는 문헌이 없고 다만 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순응대사가 중창했다고 전해지며 혹은 고려초 도선국사, 보조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 신라의 명필 김생(711∼791)이 쓴 규봉암의 현판이 전해 오다가 절취당했다고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고려 말에 왜적들과 전투를 벌였던 격전의 현장이기도 한데 이성계가 전북 황산대첩에 나가 왜적과 싸우다가, 규봉암으로 도망친 왜군 폐잔병 12명을 생포했다는 기록도 있다. 1739년 3월 20일에 쓴 규봉암 상량문이 발견되어 당시에 규봉암을 재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지도서(1759)에 의하면 폐찰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로보면 규봉암이 그리 크게 증축되지 않았거나 다시 폐찰되었을가능성이 있다. 이후에 6. 25 동란으로 사찰이 불에 타 10여년간 폐허가 되었다. 1957년 관음전과 요사채를 지어 복구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규봉암 옆에 있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암괴석 광석대는 입석대,서석대와 더불어무등산 3대 석경(石景)으로 꼽힌다. 규봉암에 오르자면 화순방면에서는 이서면 영평리 장복동 마을에서 오르는 등산로나 광주시 무등산국립공원 증심사 지구에서나 원효사 지구의 탐방로를 주로 이용한다. 규봉암까지의 소요시간은 국립공원 입구(증심사 또는 원효사)에서 2시간 가량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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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내륙 한가운데에 위치한 화순은 조광조가 그의 이상을 펼치지 못하고 유배되어 죽음에 이른 곳이며 방랑 시인 김삿갓은 중국 적벽에 못지 않게 아름다운 화순 적벽의 절경에 반해 그 곳에서 죽음을 맞기도 했다. 최근 들어서는 운주사 천불천탑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화순읍 남산공원은 1970년 10월 조성된 공원으로 공원 중앙에 군민회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숲이 좋아 주민들의 좋은 휴식처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공원 내에는 양한묵 선생추모비와 충혼탑이 세워져 있으며 편의시설로는 서양정(궁도협회 궁도장)과 각종 쉼터시설 등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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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태조 1)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능주의 서쪽에 창건되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가 1600년에 현령 하응도(河應圖)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611년 현령 윤수(尹燧)가동무(東廡)·서무(西廡)를 중건하고 1724년에 중수하였으며, 1775년에 목사 이광도(李廣度)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이 중수하였다. 1921년에는 동무를 중건하고 1923년에 명륜당과 서무를 보수하는 한편, 동재와 서재를 신축하였으며, 그뒤로도 수차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향교재단에서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1855년(철종 6) 이후에 재임한 역대 임원들의 기록이 잘 보관되어 있는데, ≪능주향교유안 綾州鄕校儒案≫·≪사마재유사안 司馬齋有司案≫·≪양사재집강안 養士齋集綱案≫ 등의 안류(案類)와 ≪육영재절목 育英齋節目≫·≪능주목유생흥학절목 綾州牧儒生興學節目≫ 등 절목류의 기록이 10여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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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읍 대리에 있는 칠충각은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때 화순에서 의거한 평택 임씨 칠종 형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고종 13년(1876)에 건립한 것이다. 병자호란 때 의거한 인물은 임시계, 임시태, 임시민, 임시운, 임시준, 임시익, 임시약 등으로, 이들 종형제는 화순의병과 함께 청주까지 진군하였으나, 인조임금이 청의 태종에게 항복한 소식을 듣고 국가에 충성하지 못함을 통탄하고 귀향하여 은거생활을 하다가 일생을 마치니 고종 13년 (1876)에 이들의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벼슬을 추증하였는데, 임시계에게 예조참의(정삼품), 임시태에게 좌승지, 임시민에게 예조참의, 임시운에게 호조참의, 임시준에게 좌승지, 임시익에게 좌승지, 임시약에게는 호조참의를 추증하고 칠충각을 건립하게 했다. 현재 문화재자료 제 65호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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